커크가 세상을 등지고 있어도 변한 것이 없다. 바람 한 점 그 자리에 머무는 법 없었다.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잔인하지만 세계를 이루는 원칙이기도 했다. 어느 한 사람의 죽음으로는 이 세상에 변화도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팍의 세계만은 예외였다. 커크가 눈을 감는 순간부터 쭉 멈춰있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스팍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커크의 병실에 찾아왔다. 회사로 가는 평일이든, 집에서 쉬는 주말이든 관계없이 스팍은 그저 묵묵히 잠든 소년의 곁을 지켰다.
세 번째 계절이 오기 전, 맥코이가 스팍을 불러 말했다. 회복이 되었음에도 커크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했다. 커크가 세상에 없다는 말만큼이나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스팍은 맥코이의 말을 곱씹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 커크를 바라보았다.
눈 뜨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 살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고 했다. 이제까진 의식만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있다지만, 신체만 회복이 되면 그래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커크는 자신을 사랑하니까. 자신은 그를 버릴 수 있어도, 그는 그럴 수 없으니까.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까.
그것이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끝까지 제게서 멀어지려고 할 줄은 몰랐다. 커크는 말 그대로 지쳐버린 것이다. 자신도.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도 더는 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이름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은데, 스팍은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커크가 좋아하던 어조 그대로 이름을 불렀다. 최대한 다정하게 들리기 바랐다.
“제임스…….”
스팍이 이름을 부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레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가 눈을 뜨기 전엔 사과하는 것마저도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수단이 될 듯 했다. 그레서 스팍은 미안하다는 말도 아낀 채 그저 커크가 눈을 떠 자신을 책망해주길 바랐다. 그 때야 진짜 사과를 전할 수 있으리라. 자신이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전하고 싶었다.
스팍은 병원에 올 때마다 매일 자신이 온 것을 알려주기 위해 커크에게 마인드멜드를 시도했다. 그러나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는 문처럼 커크의 의식은 꽉 닫혀있었다. 대신 병원에 왔던 첫 날처럼 표면적인 기억만은 읽을 수 있었다. 스팍은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을 아껴보듯 커크의 생애를 낱낱이 훑어보았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잘 알아야만 한다. 스팍은 커크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자신도 제 감정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열어둔 창문에서 싸한 바람이 들어온다. 소년을 만났던 겨울이 오려하고 있다. 혹여 기침도 제대로 하지 못할 그가 감기라도 들까 창문을 꽉 닫은 스팍은 커크가 좋아하던 간식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빨간 리본이 나비모양으로 묶여 있는 납작한 흰 상자. 후각이 좋은 커크가 달콤한 향기를 먼저 맡고는 현관에서부터 꼬리를 흔들곤 했던 사과파이였다. 선물의 주인공이 몇 개월째 맛보지 못하는 선물. 스팍은 매일 새 간식거리를 사와선 다음 날이 되면 다른 병실에 가져다주었다. 맥코이는 덕분에 아이들이 호강한다고, 가끔은 댁도 좋은 일을 한다며 드물게 미소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팍에겐 그리 즐거운 행위는 아니었다.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커크의 침대 곁에 앉은 스팍이 늘 하던 일과를 시작했다. 매일 정성스레 소년의 얼굴과 몸을 젖은 천으로 닦아주고, 머리칼을 매만져준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분만을 공급하는데다 움직이지 않아 근육이 위축되는 탓에 누워있는 커크의 팔다리는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가는 손가락을 쥐고, 그 사이 연한 부위를 부드럽게 천으로 훑어준다. 팔뚝을 타고 올라가선 겨드랑이나 갈비뼈가 도드라진 옆구리, 허리, 그 아래 골반, 사타구니, 발가락 끝까지 따뜻한 물에 적신 천으로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 만지기도 아까운 여우 귀나 꼬리도 잊지 않고 씻겨주고 브러시로 빗겨주었다.
전신 구석구석을 내 맡기는 동안 미동도 않는 소년에게 새 환자복을 입히고 나면 스팍의 셔츠 칼라가 약간 흐트러져 있기도 했다. 커크의 앞에서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스팍이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엔 곁에 앉아 그가 눈 뜨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늘 먼저 말을 걸었던 커크 대신 스팍이 입을 열기도 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케이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 요즘 당신에게 사용하는 브러시가 마음에 드는 지 궁금하다는 이야기, 맥코이가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해서 자신이 금연을 종용했다는 이야기들……그러다 답이 없는 커크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는 간절하게 보고 싶다 속삭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