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떼는 순간엔 언제나 망설이게 된다. 그에게 가도 되는지 그래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생각은 긴 듯 짧고, 다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수초도 지나지 않아 익숙한 길을 홀로 걸어간다.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더러운 골목에는 구정물이 고여 있다. 제일 깨끗한 옷을 골라 입었기에 평소와는 달리 조심히 돌아간다.
근심어린 얼굴을 한 바짝 마른 노인이, 아버지 또래의 술주정뱅이가 아무렇게나 구겨진 골목을 빠져나온다. 그림자가 도망치듯 뒤따르는 것을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스팍. 그가 사는 곳까지 가는 거리는 짧지 않다. 많은 곳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아무 곳에나 시선을 흘리지 않는다. 사실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못 보던 최신형 바이크가 서 있어도 나를 세워 두진 못했다. 오늘 분의 거짓말을 생각해야 하니까.
길을 걷는 내 머릿속에는 거짓의 지도가 그려진다. 이미 없는 엄마를 떠올리고, 이미 죽은 아빠를 그린다. 그 속에서 나는 제법 귀여움을 받는 아들이며 행방이 묘연한 형과도 사이가 좋다. 틈만 나면 손을 대는 후견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 어제는 엄마의 생신이었다고 하자. 그녀를 위해 아빠와 형, 나는 요리를 했을 것이다. 결과물은 썩 좋지 못해도 엄마는 기뻐했을 거고, 우리는 작은 선물을 꺼내놓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를 위해 발레리나가 그려진 예쁜 오르골을 선물하기로 한다. 모든 것은 그저 주워듣고 본 것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럴 듯 했다. 간접경험을 실감나게 재구성하는데 나는 꽤 재주가 있다. 혼자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 공상을 자주 하게 되어서였다. 걸음이 보태어질수록 상상은 정밀해지고 얼굴에 걸어놓은 미소는 진짜가 된다.
사십분 정도를 걷다보면 내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계절의 축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싱그러운 녹색이 기다린다. 잘 정비된 잔디들, 흰 나무 울타리들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주택들이 보인다. 내 목적지 역시 이곳에 있다. 먼 길을 걸어 기진맥진할 정도가 되었지만, 무릎을 털지 않고 그대로 걸어간다. 한번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어서였다.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고급 주택들 사이를 능숙하게 지난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파이크 아저씨 덕이다. 부하였던 아빠를 대신해 나를 보살펴 주던 아저씨는 죽고, 그리고 그 집에…….
“스팍.”
그 남자가 왔다. 나는 입 속에서 딱 끊어지는 두 음절을 발음해본다.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무뚝뚝한 것 같기도 하다. 이름은 가진 주인을 닮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이름을 닮아가는 것일까. 궁금해진 나는 내 이름인 제임스 커크를 발음해보려다 말았다. 어느 쪽이든 그리 달가운 방향은 아니었다.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다리를 독려한다. 곧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푸른색 나무 울타리를 가진 초록색 주택이 보인다. 가운데 커다란 창이 있고 그 아래 흰 대문이 있다. 양 옆으로도 큰 창문이 두개씩 있는 주택이었다. 식물을 좋아하던 파이크 아저씨의 취향으로 가꾸어져, 집 주위는 담쟁이 넝쿨이나 달리아, 시네라리아, 러넌큐러스, 아네모네 같은 꽃으로 가득 차 있다. 아저씨가 죽은 뒤로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고, 나는 방치된 화원을 보러 이따금씩 오곤 했었다.
그를 처음 본 날도 그랬었다. 아저씨의 화원에 어설프게 물이라도 주려 먼 길을 걸어왔었다. 늘 드나들던 이 빠진 울타리 틈으로 들어서자, 정문에서 현관까지 가는 작은 오솔길이 산사나무아래 가려져 있었다. 그래서 눈치 채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화원에 도착해보니 흰 의자에 누군가 앉아 오수를 즐기는 중이었다. 아저씨가 죽은 후 내 차지가 된 의자였다.
“…….”
나는 순간 그가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와 나만의 공간이기도 했던 화원에 들어와 있으니까. 욱 했던 마음도 잠시, 나는 남자의 특이한 생김에 주목했다. 이 근방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바가지 같은 머리모양과 옷도 신기했지만 그보다도 놀라운 건 뾰족한 귀였다. 조금 둥글게 모가 난 귓바퀴는 내게 달린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토끼처럼 마냥 뾰족한 것도 아니고, 돼지의 것처럼 널찍하지도 않다. 그저 예쁘게 보이려 빚어놓은 것 같았다.
예전에 형이 가져다 준 소라가 이렇게 생겼었나.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렸을 때, 그 단면이 꼭 이랬던 것도 같다. 동그란 구멍에서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뾰족해지던 소라껍질이 바다의 소리를 들려준다고 했었다. 겉면이 푸르게 빛나는 예쁜 소라껍질은 금세 보물이 되었다. 한 번도 바다를 가본 일이 없어 종종 소라껍질에 귀를 기울여보곤 했다. 주먹보다 조금 큰 소라 속에선 고막이 울리는 듯한 고요한 소리가 들렸다. 어린 나는 그게 무척 신기했다.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소라껍질에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자장가 같은 공명이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겁도 없이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목 위까지 높이 올라오는 회색 튜닉을 입고 있던 남자는 내가 한 걸음만 남길 때까지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잔디가 소리를 숨겨주었다고 생각했다. 맞은 편 하얀 테이블에는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파이크 아저씨도 책을 읽으란 잔소리를 곧잘 했었는데……나는 서글픈 회상을 쫓고 두꺼운 표지를 가진 책들의 제목을 읽어보았다. 원예에 관한 책들이었다. 남자는 이 주택을 에워싼 식물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이 집이 팔리게 된 걸까. 아저씨의 시신을 수습하러 왔던 남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사정이란 또 모를 일이다. 엄마가 그 한 마디면 나를 떠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렇다면 이곳의 불청객은 이 남자가 아니다.
나는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저씨는 아빠가 죽고, 형이 가출하고, 엄마가 사라졌을 때 나를 찾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음을 열려하지 않은 나를 억지로 어르고 달래 이 집에서 머물게 하기도 했다. 아빠 대신으로 여겨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설레고 기쁜 순간이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다들 그랬듯 아저씨 역시 내 곁에서 사라졌으니까.
곁에 머물러달라고 부탁하진 않았지만 떠나길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꼭 버려진 정류장 같다. 누구나 지나칠 뿐 머무르는 일은 없다. 아저씨가 죽고 이 집만이 나를 받아주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괜찮다. 잃는 것은 익숙하니까.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다. 먼발치에서도 이 화원을 볼 수는 있다. 납작하고 도톰한 푸른 잎사귀를 다시 만지는 일은 없겠지만. 꽃대가 휘어질 듯 커다랗게 피어난 장미를 어루만지지도 못하겠지만. 그것으로 좋다. 좋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서러움으로 뜨끈해지는 눈시울을 모른 척 하고 돌아섰다.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게 아닙니까.”
우뚝. 발을 멈추게 하는 음성. 귓속으로 꽂히는 목소리는 소라껍질 속 고요와 닮아있었다. 차분하고 정적인 발음은 서늘한 온도마저 품고 있다. 나는 뭔가를 훔치다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바짝 좁히곤 놀랐다. 한참을 기다려도 질책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고, 나는 가까스로 답을 할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멍청한 물음이었다.
“……깨어…있었어요?”
“처음부터 수면 중이 아니었습니다.”
자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명상을 종종 하는 것이 자신의 종족 특성이라고도 했다. 벌컨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외계인’의 자기소개는 간단했다. 스팍.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깨진 소라껍질을 생각했다.
2
먼 길을 오지 않은 것처럼 낡은 신발에 붙은 먼지를 털어낸다. 땀이 식기를 기다려 화원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스팍이 맞아주었다.
“지미.”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얻은 보상이 이것이다. 저절로 미소를 그리게 하는 애칭. 처음엔 지미라 불릴 때마다 귀가 간질거렸다. 그렇게 불러주던 사람은 파이크 아저씨가 마지막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들으니 나조차도 나를 가리키는 게 맞는지 어색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저씨의 의자를 차지한 남자가 지미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속 보이는 대리만족이라는 것은 안다.
“스팍! 저 왔어요!”
“오늘은 평소보다 15분가량 일찍 왔군요.”
“네. 엄마가 일찍 보내주셨어요.”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스팍이 마실 차를 내어주겠다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하얗고 동그란 테이블 앞엔 내 몫의 의자가 있다. 아저씨가 있을 때 마주 앉곤 했던 의자다. 그가 죽은 후 둘 중 하나는 늘 비어있어야만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끝없이 확인하는 일은 하나면 족하다. 그래서 화원 뒤켠에 숨기듯 놓아두었었는데 이제 다시 ‘내 자리’가 되었다. 무성한 수풀이 이루는 그늘 아래 만들어진, 스팍이 내어준 자리였다.
“오늘은 3일 전보다 산미가 적은 차로 준비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내 앞에 투박한 찻잔이 놓여졌다. 너무 신맛이 난다고 한 마디 한 것을 기억해주었다. 연한 주홍빛을 띄는 찻물 위로 내 얼굴이 비친다. 뺨이 빨갛게 보이는 것은 찻물 때문이겠지? 나는 쾌활하게 고맙다 말하고 뜨거운 차를 불어 마셨다. 스팍은 단맛이 적은 과자가 담긴 접시를 가리켰다. 과자를 즐기지 않는 그가 나를 위해 언젠가부터 준비해두는 것이다. 혀가 녹을 정도로 달콤한 맛은 없었지만 은은하고 깊은 맛이 있다. 스팍의 다정함을 닮아 있다.
“지미.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습니까.”
스팍은 인사말 대신 이 말을 곧잘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말을 했는데도, 늘 걸어온다 말해서일까. 둘러댄 말과 달리 실제로는 꽤 노고가 있기에 왠지 위로가 되곤 한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했다. 거짓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스팍에게 오는 길은 멀더라도 기꺼이 걸을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조금 지치게 되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걸어가는 동안 바뀌어 가는 풍경이나 내가 그에게 가기 위해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그 모든 여정을 좋아하게 되었다.
스팍이 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몰라도 그와 함께 있는 것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니 일부러 묻지 않았다. 내가 스팍에게 물으면, 그도 나에 대해 물을 수 있다는 불안도 있었다. 준비된 거짓말이 아니면 어딘가 엉성한 틈이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멋대로 집안에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꺼내야 했던 게 싫었을 뿐이다. 가볍게 둘러대고 난 다음에는 호감을 얻고 싶어 작은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먼저 한 거짓말을 정밀하게 하기 위해 다른 거짓말로 탑을 쌓는다. 보기 좋은 거짓이 내 비루한 진실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형 그 자식……아니. 형이요.”
잘 하고 있었다 싶었는데, 그만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 거친 말을 들었는지 차를 마시던 스팍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귀가 밝아 조그맣게 속삭인 말도 놓치는 일이 없다. 나는 아하하, 계면쩍게 웃으며 식기 시작한 차를 들이켰다. 우리 사이가 편해서 그래요. 얼굴을 본지 2년도 넘은 형을 오늘도 본 것처럼 말하며 웃는다. 원래 쓰는 말이 험상궂은 편이라 그런지 스팍의 앞에서도 가끔씩 삐죽한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럴 땐 한 번씩 식은땀을 흘린다. 그의 앞에서는 예의바른 아이처럼 보이고 싶은데.
“음, 저기 스팍……이거 어때요? 아빠가 사주신 건데요. 어울려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눈을 굴리다, 입고 있던 푸른 셔츠자락을 잡아당겼다. 사실은 이 근방을 돌다 훔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은 형에게 물려받은 옷들이라 많이 낡고 헤져 있었다.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아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뱉어 놓은 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말로 수습할 수 있는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별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고 말았다. 이런 방식으로 밖에 살 수 없는 자신이 싫지만. 나는 늘 내가 싫었으니 새삼 우울해 하지 않는다. 않기로 했다.
스팍은 대답을 바라는 내게, 셔츠의 연한 푸른색이 내 눈동자 색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잘 어울린다거나, 멋져 보인다는 말은 따라붙지 않는다. 그래도 실망하진 않았다. 그의 표현에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았어도. 어울린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된다는 것은 안다.
걸치고 있는 옷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창가에서 집어 온 것이지만 이 순간은 사랑하는 아빠가 내게 준 선물이 되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살지 못할 어딘가의 미래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영원히 젊은 나이로 남을 아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스팍에게 들려주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한 번도 만나본 일은 없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내가 모르는 만큼 스팍도 모를 테니까. 나를 만든 남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파이크 아저씨의 성격을 적당히 섞어 말했다. 주워들은 것에 끼워 맞추고 바라는 것을 가미한다.
나는 잘 훈련된 배우처럼 거짓말을 능숙하게 해냈다. 집에서 몇 번이고 연습한 보람이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고 기쁜 듯 웃었다. 성실히 가장한 기쁨에 진짜 취해버린다. 그러나 내 거짓말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나를 속일 수가 없다. 거짓말이 빛날수록, 자괴감이 짙어졌다.
3
벌컨들은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라 한다. 참 이상한 미덕도 있네요. 말하고 나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닐까 주저 했지만 돌아온 답도 무던했다. 인간들은 오히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벌컨들이 왜 그러는지 알겠어요. 스팍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스팍은 파이크 아저씨처럼 따뜻하게 웃어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는 않는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저 담담하게 경청해줄 뿐이다. 따뜻한 햇볕보다는 조용한 그늘 같은 남자였다. 정적이고 단정한 분위기가 좋았다. 새벽잠을 깨우는 고성이나, 집을 해체하는 산란한 소음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 좋았다. 그의 곁에 있으면 너무나 쉽게 현실과 나를 분리할 수 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걸은 만큼 괴로워졌다. 내가 했던 말이 허상인 것을 확인하는 여정이라 그렇다. 스팍에게 갈 때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며 돌아간다. 집 근처까지 다다른 나는 버려진 폐가로 들어간다.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던 내 옷가지를 찾았다. 다 피지 않은 덤불 뒤에 숨겨둔 낡은 티셔츠. 낮 동안 햇빛을 받아 누렇게 변한 것을 다시 꿰입었다. 손에 들린 파란 셔츠는 입고 있는 내내 불편했는데. 먼지 냄새가 나는, 뜨끈한 천은 내 피부인 것처럼 감겼다. 무엇이 진짜인지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렇게까지 쓰레기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4
거울을 보니 왼뺨이 부어있었다. 들키지 않고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란 건 오만 이었나. 창문 안으로 던져 넣으려 발을 돋우는 순간, 그 집 남자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부모는 뭐하는지, 너는 어디 사는 아이인지 호된 추궁에도 별 할 말이 없었다. 씨근덕대던 사내는 어린놈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며 청하지 않은 훈계를 했다. 침묵을 지키자 뺨을 한대 올려붙였다. 벌레를 쫓듯 가라! 한마디가 끝이었다.
맞는 순간 생각한 것은 하나였다. 스팍에겐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부어오른 뺨은 넘어져 다쳤다고 말하기에는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물며 괴팍한 후견인인 K도 누군가에게 책이 잡힐 까봐 내 얼굴에는 손을 대지 않는데. 뺨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지 말아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며 집으로 왔다.
파이크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은 단순히 집이 아니라고. 단순히 쉴 수 있는 공간과 보금자리가 되는 공간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어야 집이라 말할 수 있다고 했었다. 한 때는 아저씨가 내 집이 되어줄 뻔 했다. 그 때 꿀 수 있는, 가장 괜찮은 꿈이었다.
거울의 뒤편으로는 잡동사니들이 비친다. 아무렇게나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옷가지들이 마지막 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내키는 대로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하기도 하지만 정신 차리면 다시 이 지경이다. 누구에게 보일일이 없어 그런지……아니면 나도 그냥 방치되고 싶은 것인지.
K는 내 천성이 게으른 탓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맞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엇이든 내 잘못 아닌 것이 없으니.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뜨거운 뺨의 통증이 덜 하다. 뭔지 모를 뿌연 얼룩으로 더러운 거울을 대강 물로 훔쳐냈다. 빛이 바래기 시작한 금발이 젖은 채로 눈꺼풀 위에 달라붙어 있다. 손으로 털어내다 문득 동그란 귓바퀴를 보았다. 스팍을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나 다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여겼는데.
귀가 뾰족해지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아니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충동적으로 가위를 찾았다. 한참을 뒤지다보니 테이블 아래 팽개쳐져 있었다. 빨간 플라스틱 손잡이를 가진 가위는 내 손바닥보단 컸지만 날이 무딘 편이다. 이걸로 자를 수 있을까. 거울 앞에 서서 귓바퀴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가장 높이 솟은 곡면을 조금 갈라보았더니 새빨간 피가 흐른다. 낡은 티셔츠로 덮인 어깨에 똑똑, 방울지어 떨어졌다. 화끈거리는 통증은 얻어맞은 뺨보다 아팠지만. 더 아픈 것은 귀를 자른다고 해서 스팍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 그 화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파이크 아저씨가 나와 함께 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스팍도 나를 그렇게 여겼으면 좋겠다. 아무런 접점도 그럴 이유도 없는 내게 그래주었으면 좋겠다고……뻔뻔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내가 말할 수 없으니 그 쪽에서 바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내가 무얼 하면 되나요. 간절하게 물어보아도 거울 속 소년은 응답이 없다. 짙푸르게 물든 눈동자는 지쳐보였다. 하긴 알리가 없으니까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눈 뜨고 배운 거라곤 망치는 것 밖에 없다. 새로 시작하는 방법은 모른다. 누군가 그것을 알려줄 수 있기는 한 건가. 그럴 누군가가 생긴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는가.
나는 피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세면대 위로 빨간 피가 흘러 까만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오물과 섞여 하수구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그렇게라도 여기서 벗어나면 좋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